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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여행

안성죽주산성 장군 - 안성여행 다케슈 산성 성문주 장군과 미륵을 찾아

by goodtripman 2025.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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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죽주산성 장군

안성여행 성문주 장군의 숨결을 찾아 비봉산 다케슈 산성을 오른다. 고려 고종 5년인 1218년 몽골군이 거란족 토벌을 명분으로 국경을 넘어왔다. 거란족이 저항한 서경 동북의 강동성은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에 의해 고종 6년인 에 함락했다. 이후 몽골 사신 저고녀가 피살되는 고종 11년 1224년까지 고려와 몽골의 불안한 관계가 이어졌다. 이 시기에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몽골이 주변 지역을 차례로 침공해 고려에 많은 제물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고종 8년인 1221년에는 수달 1만장, 고급 실크 3천피르, 종이 10만장을 포함해 고려가 여유가 없을 정도로 방대한 양의 물품을 요구했다. 저고녀가 피살되어 7년이 지난 고종 18년 몽골 침략이 시작됐다. 몽골은 저고녀의 피살을 침략의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상은 칭기스칸 사망한 1227년 황위를 계승한 태종 오고타이칸의 동아시아 정복전쟁 정책이 연장선이었다. 몽골의 고려침략은 7회에 걸쳐 계속되고 있으며 집권세력 최씨 무신정권은 1차 침략 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 백성을 산성과 섬으로 반입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정면 대응하기 위해서는 고려의 군사력이 약하다는 현실적인 측면도 감안된 방식이었다. 강화도 천도 후에 2차 침략이 있었지만, 아내인성의 싸움에서 몽골 장수 사리대하 전사하자 퇴각했다. 살리타이 전사로 퇴각한 이듬해 몽골은 금 수도를 함락시켰다. 그 후 금국을 완전히 멸망시킨 몽골은 고려에 대한 3차 침략을 계획했다. 3차 침략은 고종 22년의 1235년부터 26년의 1239년에 이르기까지 5년에 걸쳐 계속되었다. 고려정부는 3차 침략시기인 고종 23년 1236년 산성방호별감을 몽골군이 지날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에 파견했다. 방호별감은 산성에서 피난한 백성을 통제하면서 군사작전을 전개했다. 지금의 안성시 죽집마면에 있는 다케슈 산성에는 송문주 장군이 방호별감으로 파견되었다. 다케슈 산성은 경상도, 충청도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일 뿐 아니라 한강과 서해안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가 되기 때문에 몽골군이 반드시 통과할 수밖에 없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석불 입상은 미륵상으로 높이 5m60cm로 신선하게 머리 위에 걸어 올린 모습으로 고려 전기불상의 양식적 특성을 잘 갖추고 있다. 미륵 앞을 지키고 있는 미륵당 오층석탑은 경기도 향토유적 제20호로 건립시기와 후원자가 아는 탑지석이 출토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도보로 약 15분 정도 떨어진 곳에는 천년 전 불교의 미륵 사상이 위세를 흔드는 봉업 사지가 있다. 봉업사지는 고려시대의 절적으로 양주회암사, 여주고달사와 함께 경기도 삼대사원으로 꼽히는 거대사원이었다. 통일신라시대 ‘화차사’로 불리는 태조왕건이 ‘고려업을 일으킨 곳’이라는 뜻으로 ‘봉업사’로 승격시켰다고 전해진다. 경기도는 1966년 경기 정리 작업을 통해 출토된 유물 명문을 통해 봉업사의 정확한 이름을 확인했다. 그 흔적은 고려사에서도 볼 수 있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고 남쪽으로 내려간 청주를 거쳐 올라갈 때 이 절에 서서 태조의 고진에게 인사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봉업사는 태조왕건의 초상을 봉안한 진전사원으로 왕실의 의지로 죽은 왕의 진영을 모시고 위업을 기리며 명예를 비우는 중요한 사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1530년 문헌에 봉업사는 사라졌다고 전해지지만 인고의 세월을 견뎌낸 봉업사지 삼층석탑, 석불입상 등 문화재가 그때의 영광을 기억해 남아 있다. 당시 봉업사의 위엄을 어렵지 않고 그려볼 수 있어 지금은 새로운 봉업사가 대웅전을 시작으로 불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 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봉업 사지 3층 석탑이다. 석탑의 모형은 단층 기단 위에 세워진 방형의 3층 석탑으로, 중대석은 각면 1식으로 우주형이 조식되었다. 2층 이상의 옥신은 1층에 비해 체감률이 급격히 줄어들어 상층으로 갈수록 체감비례를 보이고 있다. 옥신에는 그 자체의 폭에 비해 좁은 우주형이다. 지붕은 평평한 편이고, 옥석대는 각 층 4단으로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하고 전각의 반전은 심한 편이다. 타마이에 옥신을 받기 위한 괴임이 깨어났다. 상륜부는 전실이 되어 남은 적이 없다. 석탑의 전체적인 구성은 둔감을 주고 있다.

 

▲ 안성여행 다케슈 산성 성문주 장군과 미륵을 찾아 산성을 오른다. 난공불락의 요충, 다케주야마성은 조상실록에 사간이 덕현(오성과 한음의 한음대감)은 “죽집마의 취봉은 형세가 매우 든든하고 한 군사에서도 길을 멈출 수 있는 어려운 곳”이라고 상소를 올렸다고 나온다. 그 말대로 다케슈 산성에 오르면 안성지와 이천과 나가호인이 한눈에 잡힌다.

 

▲ 안성여행 죽주산성 송문주 장군과 미륵을 찾아 만난 대주산성은 삼국시대 신라가 북진했던 가장 이른 시기 대중국교역항인 당항진 남양만에 진출하는 거점으로 처음으로 축조했다. 전주 1천688m 원래 높이 68m, 내성과 복원성 벽은 m이다. 신라중성, 고려외성, 조선조 내성으로 3시대에 걸친 삼중구조로 거의 3회 이상의 수축한 흔적을 볼 수 있다.

 

▲ 안성여행 다케슈 산성 송문주 장군과 미륵을 찾아 오르면 죽집마가 내려다본다. 안성의 옛 이름의 사망은 본래 백제의 개차산이었지만, 통일신라기 경덕왕이 개산군에 고쳐 일주일 아래에 두었다고 세종실록지리는 썼다. 동국여자승람에는 고구려 내혜홀이라는 표현이 보였고 최근 연구 결과 진흥왕 시대 신라영토에 편입된 사실이 확인됐다. 고려태조 때 대주주라고 부르기 시작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다케슈 대부분이 안성군 죽인다면 죽이는 면으로 나뉜다. 그 후, 이치조, 이식이 되고, 후에는 이치조, 죽집마로 다시 바뀌었다. 신라마 궁정이 처음 이곳의 기훈에 귀의했지만 후쿠다 접을 받으면 5년 뒤 북원 원주 양쪽으로 갔다는 기록도 있다.

 

▲ 안성여행 다케슈 산성 성문주 장군과 미륵을 찾아 다케슈 산성을 둘러본다. 죽집마는 영남대로가 강령과 추풍령 방면으로 나뉘는 분기점으로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조까지 전략적 요충지다. 조선시대에는 한양과 삼남대로를 잇는 중요한 교통요지였다. 오늘도 평택항에서 충주를 거쳐 태백, 동해항을 잇는 주요 산업도로로 38번 국도와 한반도 대동맥경부선이 만난다.

 

▲ 안성여행 죽주산성 송문주 장군과 미륵을 찾았고 백성은 그를 유령 또는 신명이라고 불렀다. 송문주 장군에 대해 전해 주는 이야기에 따르면 아들을 아주 총애하는 어머니를 위해 화난 그의 언니가 그에게 내기를 제안했다. 송문주는 굽은 나막신을 신고 송아지를 당기고 개성에 갔지만 다음날 아침 밥을 먹기 전에 돌아와 언니는 밤부터 성을 짓게 된 사람이 죽는 것이다. 이튿날 아침 누나는 이미 성을 모두 쌓고 성 남문을 방문할 때이지만 개성에 갔던 성문주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 안성여행 다케슈 산성 성문주 장군과 미륵을 찾아 어머니는 누나에게 뜨거운 팥을 먹도록 권했다. 언니가 팥을 먹고 성문을 달리자 송문주가 돌아왔다. 누나는 어머니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약속을 지켜 죽었다. 다케슈 산성의 폴이다. 성 안에는 성문주 장군의 전공을 기리는 사가 남아 있다.

 

▲ 안성여행 죽주산성 송문주 장군과 미륵을 찾아다케주산성은 고려시대에 죽주성으로 불렸지만 몽골군과의 항쟁으로 유명한 곳이다. 1236년 고려 고종 23년 몽골군은 청주와 충주로 향하는 두 길이를 만나는 중부 내륙교통 요충지였던 다케슈 산성에 이르러 고려군에 항복을 권했지만 고려군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에 몽골군은 대규모로 공격을 가했지만 결국 실패해 큰 피해를 안은 채 철수했다고 한다. 이때 백성과 함께 성을 지킨 이가 방호별감의 송문주 장군이다. 그는 이전의 귀주성 전투를 통해 몽골군에 대한 대비책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케슈 산성도 지킬 수 있었다.

 

▲ 안성여행 다케슈 산성 성문주 장군과 미륵을 찾아 손은사다. 안성 평야 지역이 평안한 고를, 안성이 된 것은 북쪽 머리에 다케주산성이 방어의 요새가 된 덕분이었기 때문에 안성의 성은 곧 다케주산성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산성야두의 성은사는 일명 꽃절로 불리지만, 봄이 오면 상춘 신록의 출입으로 인기를 모은다.

 

▲ 안성여행 다케슈 산성 성문주 장군과 미륵을 찾아 축복을 받을 기회를 얻는다. 미륵당이라 불리는 높은 누각 속에 있는 미륵불상이다. 석가문 다음에 부처가 된다고 정해진 미륵은 보살과 불의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그 모습도 보살상과 불상의 두 가지 형태로 제작되지만, 이 입상은 보살상으로 만들어졌다. 미륵부처의 미륵보살은 석가모란 불이 열반한 뒤 56억7천만년이 지난 뒤 인간세계에 나타나 용화수 아래 3회 설법해 성화해 석가모니가 구제할 수 없었던 중생들을 구제한다. 그래서 지금도 천상의 도솔천에서 수행을 계속하고 있다.

 

▲ 안성여행 다케슈 산성 성문주 장군과 미륵을 찾아가 미륵당 5층 석탑이다. 화강암 재료의 석탑에서, 화강석의 각 부재는 정사각형이고 질감을 갖도록 되어 있다. 탑지석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으며 건립연대는 고려성종 12년 993년으로 석탑 높이는 m이다.

 

▲ 안성여행 다케슈 산성 성문주 장군과 미륵을 찾아 봉업 사지 죽집마 리석불 입상이다. 연꽃과 같은 받침대 위에 놓여있는 m의 석불 입상으로 얼굴은 부드러운 인상으로 귀는 길게 뻗어 어깨에 닿고 있다. 몸에 비해 머리와 손이 크게 표현되고 있으며, 육계, 타원형 옷의 주름은 고려 초기 불상 양식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 안성여행 다케슈 산성 성문주 장군과 미륵을 찾아 죽집마 리석불 입상 옆에 있는 위에 놓인 화강암탑 신의 부재가 사라진 탑으로 현재 2층탑이다.

 

▲ 안성여행 죽주산성 송문주 장군과 미륵을 찾아다케산리 3층 석탑이다. 고려시대 큰 사원의 봉업사가 있던 곳에서 통일신라시대의 탑 위에 고려시대 에소 국사가 재건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두꺼운 지붕석, 4단 지붕석 지주 등의 조형양식을 볼 때 고려시대에 탑을 보수하면서 새로운 양식을 가미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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